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도 일본어설 (문단 편집) ==== [[진한|진한어]]에 대한 검증 ==== 알렉산더 보빈은 초기 [[진한]]에서 쓰였던 언어를 [[일본어족]]에 속한 언어로 보았고, 북쪽에서 내려온 [[한국어족]] 계통의 화자들이 [[신라]]를 건국함에 따라 진한 지역이 한화(韓化)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이 설에 따르면 초기 진한어는 [[일본어족]]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국어족인 [[신라어]]로 언어가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향가]] 등 현재 남은 신라어 텍스트는 전부 한국어족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보빈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양서]]에 제시되어 있는 진한의 언어를 들었는데, 그는 남아 있는 진한어 텍스트가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되어 있다면서, 이는 본래 일본어족 언어를 쓰던 진한 지역이 한화되는 과정, 즉 과도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사서들에는 신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한은 중국 방면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하고, 언어 관련해서도 중국과의 언어적 관련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주로 설명하지 일본어 계통과의 관련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보빈도 이에 대해 중국 사서에 적혀있는 진한어들은 중국어처럼 보인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중국어처럼 보이는 진한어들을 제대로 재구하고 어원을 밝혀내면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된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실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적혀있는 진한어의 예시와 이에 대한 보빈의 분석이다. > 東方人名我爲阿 > 동방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아(阿, *ʔa)라 한다. > ---- > 名國爲邦 > 나라를 방(邦, *pæwŋ)이라 한다. > ---- > 賊爲寇 > 도적을 구(寇, *kus)라 한다. > ---- > 相呼爲徒 >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 *da)라 한다. * 진한어로 나를 아(ʔa)라고 한다는 점에서, 1인칭 단수 대명사 *a(阿, 상고 한어 및 전기 중고 한어 *ʔa)를 얻을 수 있다. 보빈은 이를 중세 한국어에서의 1인칭 단수 대명사인 na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아, 진한어의 1인칭 단수 대명사 아의 어원을 일본어족에서 찾았다. 일본조어에서 나를 의미하는 *a, 고대 서부 일본어의 a, 고대 동부 일본어의 a, 고대 [[류큐어]]의 a, 세소코어의 'a, [[요나구니어]]의 'anu에서 볼 수 있듯 고대 일본어족에서 1인칭 단수 대명사는 아였다. 이를 통해 보빈은 진한 일본어 *a '나'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Alexander Vovin(2007) - Cin-Han and Silla Words in Chinese Transcription] * 진한어로 나라를 방(*pæwŋ)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자인 고노 로쿠로는 [[고제(전한)|한고조 유방]]을 피휘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러나 보빈은 고노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邦(*pæwŋ)이라는 글자를 열도 일본어에서 기대되는 마지막 자음 탈락이 나타난 형태인 근처, 장소라는 뜻의 고대 서부 일본어 pê, '-의 쪽'이라는 뜻의 고대 동부 일본어 -N-pï와 비슷한 일본어 낱말을 적은 것으로 추측했다. 이와 동계어로는 '하늘 꼭대기(구름-쪽-꼭대기)'라는 뜻의 kumo-fe-tithe에서 나타나는 쪽이라는 뜻의 고대 [[류큐어]] -fe가 있다고 보았다. 이 낱말이 때때로 류큐조어 *e를 보존하고 있는 고대 류큐어에서 문증되므로 확실히 동계어로 보았으나, 다른 류큐 방언에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본 본토로부터의 차용어 형태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보빈은 진한 일본어 *pe(ŋ) '나라'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도적을 구(寇, *kus)라고 한다는 점에서, 보빈은 賊과 寇의 대립에는 어떠한 개별 방언적·지리적 특성도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보빈은 *kus라는 진한어 낱말을 중국 사서에서 한자로 준훈차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에 대한 어원으로 중세 일본어로 무례한 부류, 범죄, 사기꾼, 불의를 의미하는 kuse에서 찾았다. 이를 통해 보빈은 진한 일본어 *kus '도적'을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 *da)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진한인들이 강력한 [[제자백가]] 사상에 심취해서 서로를 제자님(徒)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당연히~~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이는 2인칭 단수 대명사인 너를 음차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중세 한국어 ne와는 전혀 맞지 않기에, 보빈은 *da의 어원을 일본어족에서 찾았다. 일본어족의 류큐어 분지에서 2인칭 단수 대명사 너는 하테루마어 daa, [[요나구니어]] Ndaa, 시토이어 daa로, 진한어에서의 2인칭 단수 대명사 *da와 매우 유사하다. 이 낱말은 류큐어에서도 널리 퍼지지 못했지만, 남류큐어와 북류큐어에서 모두 발견된다는 사실에서 보빈은 류큐조어에 이 날말이 존재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이는 언어학자 Thorpe가 재구한, 류큐어에서 더 널리 퍼진 2인칭 단수 대명사 *Ura(Thorpe 1983, 352)와는 분명히 다른 형태의 2인칭 단수 대명사이다. 즉 류큐조어에서는 2인칭 단수 대명사가 두 개 있었다는 의미이다.] 하테루마어 daa, 요나구니어 Ndaa, 시토이어 daa에서 류큐조어의 2인칭 단수 대명사인 *Ndaa를 재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보빈은 선(先)비음화된 *Nd-를 한자로 적을 때 *d-로 전사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3세기 중국어에는 선비음화 파열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빈은 진한 일본어 *da 너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상기된 예시 외에도 보빈이 같은 방식으로 진한어를 재구한 결과, 진한어 낱말에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섞여 있다고 주장했다. 재구한 결과에 따르면 진한어에서 나타나는 일본어계 낱말은 인칭 대명사, 중요하지 않은 기초어휘, 문화어휘이고, 한국어계 낱말은 형태론적 표지 하나를 포함하여 중요하지 않은 기초어휘와 문화어휘이다. 어족을 구분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인칭대명사가 일본어족 계통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보빈은 원래 진한 지역의 토착 언어는 일본어족이었으나, 한국어족이 침입해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이 혼재되어 쓰이던 시기의 언어가 바로 진한어이고, 이후 진한 지역을 완전히 정복한 신라에 의해 완벽하게 한화되었다고 주장했다.[*B] 또한 [[마한]]의 왕이 진한까지 전부 지배하였다는 기록도 있기에, 보빈은 한국어족 사용자인 마한 지배자들이 진한 지역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동화시켜 한국어족의 영역으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반면 보빈은 양서에 제시된 7세기 신라어 낱말을 분석해도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신라가 7세기까지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것과, 두 번째는 일본어족이 기층 언어가 되어 한국어족에 남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과 관련하여 [[신라어]]를 반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주장도 간혹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도자 칭호들이 반도 일본어족의 흔적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거서간]], [[이사금]], [[매금]] 같은 칭호조차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가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라인 혹은 백제인과 왜인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거나 [[통역]]관[* 특히 백제에서 딸려보낸 일본어 통역관은 '오사(wos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이 필요하다는 문헌 근거가 굉장히 많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 해석할 수 있는 신라어 텍스트 중 하나인 [[향가]]가 남아있고, 향가를 해석한 결과 일본어족이 아닌 한국어족에 속했다. 무엇보다 신라가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증거 자체가 없기 때문에, 최소한 신라의 주류 언어는 고대 한국어 계통일 가능성이 높으며, 반도 일본어와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http://db.history.go.kr/id/jm_001r_0160_0650|일본서기1]]>, <[[http://db.history.go.kr/id/jm_001r_0220_0100|일본서기2]]>,[* 참고로 신라가 일본에 '[[인질]]'을 보냈다는 구절은 일본서기에서 원래 신라든 백제든 간에 외국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 인질을 보냈다고 서술하는 게 일본서기의 일관적인(...) 서술 방식이므로 그러려니 하자. 사신이 일본에 갔던 건 일본서기 기록대로 사실이지만 그게 인질은 아니었다는 건 한국, 중국 사료와의 [[교차검증]]을 통해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인질이라는 의미 자체가 한국과 일본의 용법이 달라 일본에서는 단순히 정부측이 사람을 보냈다는 의미로 통한다. 이에 대해선 [[일본서기]] 항목 참조.] <[[http://db.history.go.kr/id/jm_003r_0080_0010|일본후기]]>, <[[http://db.history.go.kr/id/ds_001r_0010_0010_0070|입당구법순례행기1]]>, <[[http://db.history.go.kr/id/ds_004r_0030_0070_0050|입당구법순례행기2]]> 그렇기에 보빈은 두 번째 가능성에 더 주목하였다.[*B] 다만 알렉산더 보빈은 적어도 7세기까지는 일본어족 계통 언어가 한반도 남부에서 쓰이고 있었다고 추측했는데, 신라 초기 시절인 [[사로국]]의 계통은 [[고조선]] 및 [[낙랑]]에서 남하한 [[예맥]]계임이 고고학적으로 드러났고, 사로국 시절부터 후대의 통일신라까지 단절이나 별다른 변혁 없이 6부라는 지배층이 쭉 이어진 정치체임이 고고학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그렇기에 신라의 경우 시대별로 언어가 어족 단위로 달라졌을 것이라고 상정하기 어렵다. 상술했듯이 신라가 고위층은 한국어족이고 서민 계층은 일본어족을 쓰는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것도 증거가 없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가능성은 총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사로국 권역을 제외한 나머지 진한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반도 일본어가 쓰이고 있었지만, 사로국이 권역을 넓혀가면서 한국어족을 진한 지역에 보다 빨리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즉 7세기 무렵부터 반도 일본어는 일부 폐쇄적인 시골에서만 간혹 쓰이는 언어로 전락했다는 가능성이다.[* 현재의 [[제주어]]를 생각하면 된다. 제주어는 지속적인 표준 한국어의 유입으로 인해 사멸 위기 단계에 있으며, 젊은 계층에서 이러한 토종 제주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조차 사라지고 있다.] 두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사로국 건국 시기쯤, 즉 보빈의 추측보다 훨씬 더 빨리 한반도 전역이 한국어족 사용 지역으로 모조리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이라는 가정 하에, 한반도에서 일본어족 계열의 언어는 쓰였던 적은 없으며, 한반도 전역이 원래부터 한국어족의 권역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전부 심증에 기반한 추측일 뿐이며, 결정적인 물증은 자료 부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